
에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마로조바.
러시아인이지만 자유의 나라, 미국에서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다시 태어난 이민자. 그늘진 얼굴은 또 어떻지? 콧잔등을 살짝 가리는 검은 머리카락. 동정을 품어본 적 없을 것 같은 녹색 눈. 그러나 이따금 공상에 잠기고는 하는. 그 여자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. 그 눈빛을 보고 싶어서 가끔 소냐가 살아있었으면, 하고 모레티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과 정확히 같은 마음으로 망상하기도 했다. 네 누나가 너를 기다리고 있잖아. 돌아와…. 소냐라는 아이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, 어떻게 생겼는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. 검은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소년. 누나를 향해 말갛게 웃어 보이는 미소를 가진. 너는 네 누나에게 냉장고 위의 핼러윈 사탕을 꺼내달라고 하는 법을 배웠지. 네가 그걸 배웠다는 건,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뜻해. 그것도 아주 많이. 그러니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네 누나를 꽉 안아줘. 분명 그걸로 충분할 거야. 네 누나는 너에게 무척 약한 것 같았으니까.
낙원 바깥에도 천국이 있다면, 나는 분명 그때 소냐에게 잠시나마 닿아 그 말을 전해주었을 것이다.
그리고 다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떨어진다.
지옥으로.
2044년부터 2045년까지, 반복되는 888번의 영원에 안젤리카 모레티를 비롯한 십수 명의 초세계급은 1년의 인생을 갈취당했다. 그 대가로 각자 원하던 것이든, 원치 않던 것이든, 원하고 있다고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한 것이든, 각자 무언가를 가져가게 되었는데.
안젤리카 모레티가 얻은 것은 누구와도 함께 사라지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이었다. 인생이란 지옥에 간단한 탈출구 따위는 없다. 좋으나 싫으나, 미우나 고우나, 우리는 영원히 이 도로를 달려야 한다.
아주 잠시 그 사실을 망각했던 대가는 꽤 컸다.
‘좋아해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….’
어떤 이유든 간에. 그래. 네가 염치가 있다면…. 내게 좋아해 달라고 하거나 그 어떤 좋은 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. 하지만, 나는 눈밭에 서 있는 그 여자를 다시 만나면 함정에 걸리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. 그게 문제다. 그래서 모든 일이 다 마무리 지어지고, 여덟 번째 탄환의 고통이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도 당신을 만나러 가지 않는 것이다. 나의 나약한 마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.